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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기행

지암거사 2007. 5. 3. 18:28

남유는 남쪽 지방을 여행한다는 뜻의 긍정적 의미이고 남정(남쪽으로 간다), 남천(폄적되어 남쪽으로 쫓겨난다), 남찬(유배간다)등은 여정,  유람, 유배의 부정적인 의미도 아우른다.

 

지리산은 방장산, 두류산으로도 불리며 남원, 구례, 함양, 하동, 산청에 걸쳐 있는 큰산이고 섬진강은왜구가 나타날때 두꺼비가 울어 퇴치했다는 곳으로 섬진나루가 있었다.

 

남유 노정으로의 지리산과 섬진강 기행은 신라하대에서부터 조선중기까지의 선구와 쌍계사, 황산대첩의 현장, 지리산 우산록, 복거지로서의 섬진강, 유배지의 내면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최재남 교수가 갔던 곳으로의 복습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1. 선구로서의 쌍계사...하동

쌍계사 이전의 이름은 옥천사였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쌍계와 석문이라는 글씨는 최치원이 지팡이로 썼는데 최치원을 유선으로 인식하면서 신선구역으로서의 쌍계사를 연상하게 한다. 최치원은 12세때 당으로 유학갔다가 29세때 귀국하여 31세(진성여왕 1년,887)때 진감선사비문을 썼다. 비문은 대웅전 계단 아래에 있다. 진감선사 혜소는 전주출신으로 804년 입당하고 옥천사를 창건-육조 혜능의 영당(머리부분)을 세웠다.  쌍계사를 보는 시각이 선비들은 외부의 시선으로, 선승들은 내부의 시선으로 시를 지어 대조를 보인다.

 

이달(1539~1618)의 <산사>를 읽으면 고즈넉한 산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절이 흰 구름 속에 있는데

흰 구름을 스님은 쓸지 아니하네.

나그네 이르러 문이 막 열리니

온 골짜기에 송화가 늙었네.

 

寺在百雲中  百雲僧不掃  客來問始開  萬壑松花老

 

2. 황산전투와 그 반향...남원일대 황산

려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우왕 6년 최영을 보내려다 이성계를 보내 운봉현(남원) 근처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쳐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발판을 마련한 곳으로 왜구들은 통한으로 여겼던 곳이다.

* 태조 이성계와 황산 전투

-우왕 2년(1376): 최영의 홍산전투

-우왕 4년(1378): 지리산 방면에 왜구침입

-우왕 6년(1380): 이성계의 왜구 격파

-선조 10년(1577): 황산대첩비를 세움(오랜 세월이 지난후에)

 정유재란때 큰 피해를 입게 됨 (칠불사) : 어휘각엔 황산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이름을 새겼는  데 일본사람이 파손했다.황산대첩비도 일제강점기때 파손되어 파비각에 누워 있다. 

 

황산에 대한 시는 김종직의 황산과 그의 제자인 유호인의 황산가가 있고 동편제 판소리 대가인 송홍록 생가도 둘러 보기 좋은 곳이다. 판소리는 원래 동편제를 말하는데 일제 강점기때 레코드로 만들기 위해 자본이 필요하여 할 수 없이 굵은 동편제 판소리는 일본인의 구미에 맞게 잡가가 변질되기도 하였다. 영화 서편제가 우리에겐 더 알려져 있지만서두

또 남원에는 만복사터가 있는데 일본사람들이 많이 파괴하였다.황산전투에서의 큰 패배의 앙갚음으로.

 

3. 지리산 유산록과 그 기상...지리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와 5년간 머무를 때 <유두류록>에서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함께 말하는 유산+관수를 즐겼다. 또한 남명 조식도 <두류록>과 <제덕산계정주>를 지어 그의 기상을 나타내기도.

 

4. 물외의 복거지로서의 섬진강...섬진강

섬진강은 왜구의 출현이 많았고 또한 전쟁도 치열한 곳이었는데 이정구의 <서섬강도>는 실제 가보지 못하고 그림으로 또는 남의 유람 경험의 이야기를 듣고 즐기며 글로 쓴 것인데 실제 그림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5. 유배지의 내면...광양

한양에서 유배지로 원찬지역은 크게 세곳을 꼽는다. 거제, 남해, 진도이며 마지막으로 죽거나 말거나로 보내는 곳이 제주도이다. 실제 유배지는 경치가 좋은 곳이나 가는  사람은 무서워했는데 그 이유는 장기로 바닷가의 음습한 기운이 유배가면 비실해져서이고 유배가면 고분고분해지기 때문이란다.

윤선도는 남인으로 어부사시사를 지은 사람. 처음엔 함경도로 유배되어 갔다가 양이(=감형)되어 광양으로 와 글을 썼다. 보통 유배지는 정치범이 가는 곳인데 중앙에 상황을 보고해야 하므로 고을에서 먼곳에 두지는 않는다. 고을에서 10리 이내에 장소가 정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현일의 호는 가람, 퇴계의 제자로 광양으로 유배내려와 있을 때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학문의 방도를 물으러 찾아오자 가학의 전통을 강조한 시를 지어 남명학의 부활을 기대하는 마음을 전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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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이라기 보다 내가 다닌 답사는 사찰중심 또는 보물과 국보를 찾아 나섰는데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시와 어우러진 역사인물 기행도 참 흥미롭다.  그래서 문학기행이 운치있는가 보다 .

테마따라 여행하는 것도 유유상종하는 이들에겐 더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강의대로 간다면 하루에 다녀오기에는 촉박할 것같다.  다른 이의 유람 이야기를 가지 않고 즐기는 기쁨 또한 좋았고. 이정구의 서섬강도처럼...